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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고려전쟁 드라마의 역사적인 배경 80만 대군을 말한마디로 물리친 서희의담판

DATA화수분 발행일 : 20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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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종이 10여 년 만에 왕이 아닌 감강찬 장군으로 나오는 고려거란전쟁! 넷플릭스에서 오랜만에 볼만한 드라마가 등장했는데요. 드라마의 배경인 1,2,3차 거란전쟁이 있기 전에 거란과의 전쟁에서 말 한마디로 80만 대군을 물리친 서희가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런 일이 있었나요? 

고려거란전쟁 드라마의 한장면

서론

중국인들은 거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잔혹하고 포악하게 사람을 죽이는 민족 그들이 거란군이었다. 거란이라는 말에는 칼이라는 뜻이 포함돼 있을 정도로 중국 역사에서도 거란은 포악하기로 유명합니다.

993년 바로 이 거란이 80만 대군을 모아 고려를 침입합니다.  

무려 80만이나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당시 고려는 전국에 있는 병사 수를 다 합쳐도 30만에 불과했습니다. 80만 대 30만의 대결이라 나라를 세운 지 75년 만인 993년 고려는 국운을 위협당하는 아슬아슬한 위기에 직면한 것입니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거란의 침입에 서희가 나서서 담판을 해 강동 6주를 얻었다고 돼 있습니다. 거란이 침입해 온 이 위기에 서희라는 한 개인이 나서서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 일대에 강동 6주를 개척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서희가 어떻게 탄판을 했길래 이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칠 수가 있었을까요? 전쟁을 하겠다고 온 거란군이 그냥 물러갔을 뿐만 아니라 강동 6주를 내준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의문을 오늘 이 시간에 풀어보려고 합니다. 

거란군의 구조와 전략


거란군은 보통 네 개의 부대로 세분화됐다. 연락을 취하는 전령기병 수색대에 해당하는 원탐난자군 전방에 사는 삼봉 군 그리고 본 대로 나뉘어 각기 임무를 달리 한 체계적인 군대였다. 거란군은 고도의 기마술과 궁수를 가진 정예부대였다. 이런 특성은 거란이 중국 대륙에서 정보광조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당시 거란군의 전체 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거란사 병위지를 보면 왕의 군대는 피실군이 30만 기병 왕후의 군대가 20만 기병 모두 50만이 동원 가능한 거란의 정예부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기도 엄했다. 상경성에서 고려를 침략하기로 결정한 거란군은 요양으로 향한다. 

 

요양의 역사적 중요성


임동에서 자동차로 20시간이 걸리는 요양 말을 타고 운다면 1주일은 족히 걸릴 거리다 요양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도시 한가운데 우뚝 선 탑이다. 지금은 고 증건물 사이에 가려 있지만 30미터가 넘는 이 탑은 요양의 상징물이다. 이 탑을 만든 사람들이 거란인들이었다. 그래서 거란 탑이라고 불린다 멀리서 보면 탑이 하얗게 보인다고 해 백탑이라고도 하는 이 탑은 수차례 보수공살에서 비교적 당시 모습 그대로 전해진다. 이 탑을 세울 당시만 해도 탑은 요양 어디서 볼 수 있는 도시의 중심이었다. 

백탑엔 정교하게 만든 불상이 사방에 새겨져 있다. 불교를 숭상했던 거란인들은 전쟁에서도 불심에 기대어 승리를 기원했다. 전쟁에 이겨 정복왕조의 꿈을 이루겠다는 강력한 염원 이 꿈을 이루기 위해 거란이 국력을 다해 만든 탑이 100 탑이었다. 그래서 거란인들은 전쟁에 나가기 전 이 탑 아래 모여 제사를 지냈다 고려를 침략하기 위해 모인 80만 대군도 이 탑을 향해 요양 전체에 늘어섰을 것이다. 

 

거란과 고려의 전쟁 배경


고려를 정복하게 해달라는 의식을 치르고 전의를 다진 다음 그들은 마침내 출병을 단행한다. 거란군은 단숨에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봉산성을 점령한다. 그리고 거란 장수 소손녕은 고려에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낸다 80만 대군을 거느리고 왔으니 청강을 건너와 항복하지 않으면 고려를 섬멸하고 말 것이다. 고려의 국왕과 신하는 속히 항복하라 건국 이후 고려에 닥친 최대의 위기였다. 

이 거란은 중국 북부에서부터 서역까지 정복하면서 강력한 군사 대국으로 성장한 나라이다. 그런데 이 거란사를 보면 거란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병력을 80만이나 동원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려를 침략한 이 80만이라는 대군은 거란 건국 이후의 최대 규모이다. 건국 이래 최대 위기 상황을 맞은 고려의 이 국운은 이제 서희의 담판에 달려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거란의 대표는 총사령관인 소손영이었는데. 소손영은 이 자리에서 고려가 압록강 유역을 침범해서 징벌하러 왔다고 침략 이후를 밝힌다. 그러니까 압록강 유역이 거란 땅이라는 얘기이다.


압록강 여기는 그러니까 고려 거란 그 여진이 서로 국경을 맞댄 지역입니다. 이때까지는 이 땅은 이렇다 할 주인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고려가 여기저기 성을 세워두긴 했지만, 실제로는 국가를 이루지 못한 여진족이 살고 있었고, 또 거란은 동쪽 변방이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려를 침범한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가 이 지역을 침범해서 징벌하러 왔다고 밝힙니다. 거란은 왜 갑자기 이런 트집을 잡으면서 이 사상 유례없는 80만이라는 대군을 몰고 고려를 쳐들어온 것일까요? 

 




발해가 멸망하고 고려로 망명 와 살고 있는 발해인들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발해와 관련이 있다. 국내에서 드물게 거란사를 전공하고 있는 김귀현 교수 그는 고려와 거란 사이에 일어났던 한 사건에 주목하고 있다. 고려 태조 25년 거란은 고려에 사신을 보낸다 이때 낙타 50 필을 함께 보내 거란은 고려와 친선을 요구한다. 왕건은 사신 30명을 소음으로 유배시키고 낙타는 개성 만부교 아래 매달아 굶어 죽게 한다. 

거란으로서는 참 최선을 다해 가지고 친선 관계를 유지하려고 왔는데 이걸 인제 그냥 거절한 거죠. 예를 들면은 우리가 그냥 안 가고 이렇게 거절한 건 모르지만 낙타도 보내고 사신 30명까지 보내와서 친선 관계를 맺겠다는 것을 그걸 딱 거절하고 사신까지 인제 원도로 이 귀양 보낼 정도라 그러면은 이것은 그야말로 참 아주 적개심이 강했다.

왕건이 이렇게 당환 조치를 한 이유가 고려사에 나와 있다.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친하게 지냈으나 갑자기 의심을 해서 약속을 어기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것은 아주 무도한 짓이다. 전쟁을 불사한 조치였다. 건국 당시부터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공헌했다. 고려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됐다. 뿐만 아니라 왕국마저도 고구려 성을 본따 만들 정도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수려한 왕궁을 개성해 지었지만 이후에 고려는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을 서경으로 정하고 중요하게 여긴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북방의 영토를 넓히기 위한 북진정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발해에 대한 고려의 정책도 북진정책의 일환이었다. 중국의 한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왕건이 발해와 고려는 혼인 관계라고 밝히고 있다. 고려가 발해와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고려와 거란의 역사적 관계


발해 멸망 이후 고려는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가운데는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도망오자 고려는 그를 우대하여 왕 씨 성과 이름을 주었다고 한다. 

고려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서 압록강 근처 변방에 모여 살게 했다. 그들에겐 압록강 일대의 성을 지키는 역할이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려는 고려의 의지는 압록강가에 20여 개의 성을 쌓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북진정책을 고수하면서 거란에 대해서는 사신을 유배 보내고 선물한 낙타를 매달아 죽이는 고려의 조치는 거란을 자극했던 것이다. 


당시의 성왕을 기록한 고려사를 보면은 할 서경 이북 일부 종신들은 할 서경 이북 그러니까 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떼주자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또 일부에서는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항복을 하고 빌자는 얘기입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숙박했는지를 알 수 있는 그런 대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인은 담판을 주장하고 담판장의 고려 대표로 나서게 됩니다. 

서희의 외교 전략과 담판


이 담판 결과는 잘 아시는 대로 80만 군대를 돌려보내고 거란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던 압록강 일대 강동 6주를 우리 땅으로 인정하게 한 것입니다. 이 담판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킨 서인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서희의 배경과 과거 제도


 서희 18에 과거에 급제해 국정을 총괄하는 관청인 광평성 원효량이란 관직에 오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관리를 임용하는 새로운 방법이었던 과거제도를 통해 서인은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998년 57의 나이에 세상을 뜨기 전까지 서인은 관직에 몸담은 것으로 보인다 호족 중심의 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한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과거 세대 그들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을까? 

제1차 과거가 광종 9년 958년에 있었습니다마는 이때에 뽑은 전체 인원이 불과 7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2회 때에도 한 십여 명 이렇게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뽑았기 때문에 에 그들의 역할 입지라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소수에 불과한 신진 관료였던 과거 세대 고려는 그들을 신흥 세력으로 착실히 키워나갔다 서희의 비문엔 서희가 송나라로부터 받은 벼슬을 기록하고 있다. 검교 병부상서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서희은 32의 나이에 송나라 사신으로 파견된다. 내이시랑이란 요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내이시랑은, 즉 내 이성의 관직이니까. 내 이성은 왕에 대한 고문이나 자문 역할 내지는 정책 건의 이런 것들을 주로 담당했던 유학자들이 주로 근무했던 그런 관청으로 돼 있습니다. 그밖에 광평서의 최고의 관청으로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행정의 총책임을지는 그런 관청이었으니까. 이러한 그 관부의 차관급에 있는 사람들이 대개 파견되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희는 송나라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명예직이긴 하지만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검교 병부상서란 벼슬까지 받는다. 차관급으로 파견된 서희가 장관급인 병부상서를 받는 일은 송나라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과거 시험을 본 세대였던 서희는 이미 송나라의 4절로 파견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 관계를 어느 정도 꿰뚤어 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서희의 담판은 계속됩니다. 거란은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왜 조공을 바치지 않느냐고 서희를 읍박지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무조건 항복하라고 하던 거란의 소선영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조빙이라는 말을 쓰는데요. 조빙 국교를 맺고 예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국교를 맺자는 것으로 거란의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정말 고려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국교를 맺자는 거란의 의견을 서인은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에 조건을 다합니다. 

우리의 옛 영토 그러니까 고려의 옛 영토인 압록강 유역을 되돌려주면 그러니까 고려가 거란과 국교를 수립하는 조건으로 압록강 유역을 고려 땅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소손녕은 거란의 왕에게 이것을 알리고 1주일 뒤 거란은 서희의 제안을 받아들여 압록강 유역을 고려 땅으로 인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거란이 서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란과 고려의 전쟁 살 연구한 유재성 박사 그는 사료와 현재 남아있는 지도 가운데 북한 지형을 가장 정밀하게 묘사한 조선총독부 지도를 근거로 거란이 고려를 침입해 온 경로를 낱낮이 지도상에 그려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려를 쳐들어온 거란군의 진로를 추적해 냈다 거란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길을 피해 산을 타고 고려로 진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박주 일대에서 고려군과 접전을 벌인다 

 

서희와 거란의 군사적 긴장


거란은 안용진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진다 바로 이 시점의 의미를 서희는 정확히 포착한다. 

거란군이 초동 약전에서 거쳐 지나온 연변에 있는 고려군은 전투력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란군이 교전 상태에서 왔던 길로 되돌아갈 경우에 그들은 거란군의 무서운 위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압록강가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고려가 쌓아둔 성이 산재해 있었다. 거란군이 퇴각할 경우 이 성은 거란군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거란군은 퇴루를 생각하지 않고 이미 고려 땅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만약 계속해서 거란군이 남진을 하지 못하고 장기전에 들어간다면 거란군은 완전 포위될 위기마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란군은 속도전에 강하다 단숨에 수도만 장악하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거란군은 무조건 남진에 주력했다. 

거란의 전술이 고려에선 통하지 않았다. 고려는 고구려의 청야전술을 거란전에서 이용했다. 고려군이 퇴각할 때는 들판에 불을 질러 적이 곡식을 군량미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11월 날씨는 추워지고 거란은 군량미를 확보하는 것조차 어려워질 위기에 부딪히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거란 장수 후 소손녕은 담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장에서의 미묘한 전세의 변화가 담판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고려와 거란의 교착 상태와 전환점


이 고려와 거란이 전쟁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전투는 처음으로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이 시점을 서희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담판 결과 고려는 강동 6주를 확보하게 됩니다. 자 이 성은 서희의 담판으로 개척한 강동 6주 가운데 하나인 귀주성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영상 복원한 것입니다. 압록강 동쪽에 있는 이 지역은 이때 우리 땅으로 편입이 되면서 지금까지 중국과의 국경선으로 남아있습니다. 만약 서희가 담판에서 요구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담판 이후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일이 있는데요. 고려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수 마백필 양천두 금기라 환 500 필 낙타가 10 마리 백 필 양이 1000 마리 비단이 500 필 서희와의 담판 이후 거란의 소선영은 이렇게 선물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투가 교착 상태였다곤 하지만 거란은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땅을 고려 것이라고 인정을 하고 담판 이후에 선물까지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려와 송나라의 외교적 상호작용


서희의 담판 후 거란이 고려의 땅을 내주고 선물까지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중국 북경에 있었다. 고량강 주변 이곳은 거란과 송나라가 30년에 걸쳐 싸웠던 역사의 현장이다. 북경 일대는 대대로 중국 한족의 땅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말 혼란기에 북경은 거란으로 넘어간다 당이 멸망하고 중국 한족을 통합한 나라는 송이었다. 송나라는 북경 지역을 회복해 한족의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북경 지역에서 거란과 송은 운명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지역에서 살고 있던 거란은 4세기만 해도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민족이다. 10세기 초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여러 부족을 통일하면서 거란은 무서운 속도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이때 중국에서 거란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등장한다. 바로 송나라다 중국 대륙을 장악하려는 거란과 송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북경을 중심으로 한 연운 16주가 그들의 전장이었다. 송태조는 건국 초기부터 한족의 통일 제국을 목표로 삼고 북경 일대를 회복하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북경을 침략했다. 뜻대로 되지 않자 송나라는 거란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외교 정책에 눈을 돌린다 

거란과 송나라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외교적으로 다른 나라를 이용할 방법을 찾게 된다. 이때 중요하게 부각된 나라가 바로 고려였다.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맺는다면 송이 위태로워지고 만일 송과 관계를 맺을 경우 거란은 송나라의 위협을 받게 된다. 

따라서 거란과 송나라 모두 고려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면서 가까이 해야 할 상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를 침입한 거란에겐 다른 고민이 있었다. 당시 거란의 의중을 정확히 읽어낸 사람이 바로 서희였다. 

송과 고려가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거란은 고려를 침략한 것이다. 서희는 거란과 국결 맺겠다고 과감하게 제기한다. 서희의 판단은 적중했다. 고려와 국결 맺는 것이 그들의 목표란 사실을 꿰뚤고 있었기 때문에 서인은 강동 6주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고려의 환심을 사서 송과의 관계를 끊고 자기 나라와 관계를 맺게 하느냐 거기에 인제 포인트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땅까지 띠 주고라도 그 거란하고 거란이 이 고려와 관계를 맺는데 거기에 중점을 뒀던 거고. 또 하나는 땅 자체를 별로 처음에는 중시 안 했습니다. 고 나중에 인제 보면은 땅을 굉장히 인제 잘못 줬다 그래 가지고 나옵니다마는 어쨌든 처음에는 그렇게 된 겁니다. 

 

서희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 280 리 강동 6주는 명실공이 고려의 땅이 됐다. 거란의 80만 대군 앞에서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던 고려 그러나 서희의 담파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영토를 넓히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송나라와 거란이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 고려는 중국 대륙의 패권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고려와 송나라가 돈독해지면 거란이 불안해질 것이고. 또 거란과 고려가 친해지면 송나라가 위험에 빠질 것은 뻔한 이치였습니다. 서희는 이런 국제 관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희의 탁월함은 이런 정세 파악 능력에 있었던 것입니다. 거란 4조빙도 라는 그림은 송나라와 거란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제목을 해석해 보자면 거란이 송에게 조공을 바치러 가는 그런 그림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은 후대 송나라 사람들에게 거란에서 조공을 바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송나라와 거란의 관계는 이 그림의 제목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송나라에서 거란에게 조공을 바쳤는데 거란에게 바친 재물은 매년 은이 10만 냥 비단이 20만 필 이 재물은 송의 경제를 흔들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거기다가 거란은 형으로 송은 아우의 나라로 형제지간을 맺으면서 중국 대륙의 패권은 거란이 차지하게 됩니다. 송과 거란의 관계가 이렇게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서희의 담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은 거란과 국교를 맺은 고려는 송나라와는 완전히 교류를 끄는 것일까요? 



송나라의 수도였던 개봉은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최근 이 거리는 송나라 때 모습 그대로 조성됐다. 이 거리에서 당시 개봉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려란 이름이 들어간 간판도 눈에 뛴다 당시 거리엔 실제로 고려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송나라를 찾은 고려인들에게 최고의 관심사는 우수한 송나라의 문화였다. 

실제 외국으로 반입이 금지됐던 책과 불경조차 고려론 유입이 될 정도로 송과 고려의 교류는 각별했다. 거란과 국교를 맺고 송과 단교한 뒤에도 고려는 송과 문화 교류를 끊지 않았다. 

송대 개봉거리의 모습을 풍속화로 담은 청명상하도 국제무역 도시의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그림의 길이만 해도 약 12미터 여기엔 당시 개봉거리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거리는 온통 물건을 가득 실은 수레와 낙타로 가득했고 오가는 길목과 폭우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각국의 상인들이 집결하던 저잣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특히 송나라는 여기에 고려인을 위한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인 고려정을 만들기도 했던 것으로 전한다. 

고려의 특혜를 주면서 송나라는 엄청난 무역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소동파는 피해를 지적하고 고려와의 무역을 끊자는 상소문을 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고려가 정치적으론 거란과 관계를 맺으면서 송관은 무역으로 이득을 보고 송나라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란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나라는 고려와의 관계를 끊지 못했다. 오히려 고려의 사신을 조공사에서 국신사로 승격시킨다. 고려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송나라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서희의 담판 후 고려는 송나라를 외국의 국제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로 이용했다. 특히 고려와의 국교 단절이란 극한 상황은 송나라가 고려를 더 극진하게 대접하는 계기가 됐다. 송나라 입장에서는 무역만이 고려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송과의 단교 그러나 고려는 송으로부터 잃은 것이 없었다 서희의 담판 이후 고려는 송의 연호 대신 통화라는 거란의 연호를 쓰기 시작한다. 대신 고려는 군사 강국인 거란으로부터 강동 6주를 인정하게 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얻는다 

 

서희의 외교적 성공과 그 의미


이 4대주에 물들어 있던 조선시대 오랑캐 국가인 거란과 국교를 맺고 하루아침에 중화국가인 소음과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배신행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시대 선비들조차 서희의 외교를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송나라와 거란이라는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있던 고려 고려는 이들 나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였지만 국제 관계 속에 있어서의 힘의 균형을 이용했습니다. 두 나라 모두 고려라는 작은 나라를 필요로 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고려 외교의 힘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중국 대륙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실익을 챙긴 것입니다. 이런 외교의 기본 원칙은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친 서희의 담판은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나라에 있어서의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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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저는 조선의 왕중에 광해군을 제일로 좋아합니다. 왜냐면, 그는 임진왜란의 전장을 직접 누비면서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파악하고 다시는 이러한 참혹한 전쟁이 나서는 안되겟다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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