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1 : 광해군의 왕위 계승과 변화
서론
저는 조선의 왕중에 광해군을 제일로 좋아합니다. 왜냐면, 그는 임진왜란의 전장을 직접 누비면서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파악하고 다시는 이러한 참혹한 전쟁이 나서는 안되겟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을 겁니다. 그로인해 명나라와 후금의 관계를 직시하고 다시는 참혹한 전쟁이 조선땅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던 왕입니다. 그 과정에서 신하들은 이것이 사대의 의리를 저버리는 참담한 행동이라 믿었으며, 그러한 왕을 쫓아 내기 위해서 지속적인 역모를 꽤하게 되고 결국 말도 되지않는 빌미로 그를 왕좌에서 쫓아 냅니다. 그 결과로 제가 두번째로 싫어하는 인조가 왕이 되었으며, 결국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잘못을 뉘우치고 개선 할려고 하기는 커녕 청의 문물에 빠져있다는 이유로 그의 아들 소현세자와 갈등을 빗었으며, 소현세자는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는 어찌보면 선조보다 더 못난 왕이 조선의 16대 왕이 된것이 조선의 최대의 불행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엔 가정이 없지만 , 광해가 물러나지 않고 계속 통치를 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병자호란은 일어날수 없었겟고 그러므로 청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은 없었겟고, 자연스레 명이 사라지면서 친청 성향의 인사들이 생겨났을것이고 청의 문물과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였을 것이고 일찍 서양문물에 대한 눈을 떴을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맺기전에 프랑스나 미국과 일찍이 교역해서 일본의 침략은 생각하지 못했을수도 있었을겁니다. 근대 태국이 영국과 친교하여 외세를 막았듯이 말입니다.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했을 때는 조정의 대신들과 백성들은 광해군에 대해 많은 기대를 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능한 지도자이자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의 자질을 보여왔기 때문이었거든요. 하지만 왕이 된 이후에 광해군은 여러 옥사와 궁궐 건설에 비상한 돈을 써서 국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결국 인조 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연산군 때도 그랬듯이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날 때는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광해군은 왕의 위치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힘들게 싸워야 했던 것이죠.
광해군의 변화
왜 광해군이 그렇게 변했을까요? 왕위에 오르기까지 힘들었고, 특히 부왕인 선조에게 받은 형벌과 차갑게 대해진 마음 때문에 왕권에 집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광해군처럼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왕이 되기까지의 어려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조와 광해군의 비교
광해군, 즉 세자 시절부터 폐위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조사하고 분석해보면, 해당 기간 동안의 선조와 광해군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선조의 처음 비인 의인왕후 박씨는 자식을 가질 수 없어 후궁들을 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선조는 여러 후궁으로부터 다수의 아이들을 얻게 되었고, 이 중에서 임해군과 광해군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조는 인빈 김씨와의 관계에서 신성군을 얻었습니다. 선조는 신성군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이 아들을 세자로 삼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광해군의 정치적 입지가 좁았으며 통치내내 이러한 문제로 고민을 하게됩니다. 그러므로 조그만한 빌미가 있으면 옥사을 열고 이러한 문제에대해 스스로가 항상 불안해 했을겁니다. 아버지 선조부터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기때문에 그것을 보아왓고 이것을 빌미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시도를 했을만큼 반대파에 있던 신하들은 그를 진정한 왕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입지에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을겁니다. 이것은 순전히 선조의 탓입니다. 임진왜란의 공적도 인정하지않고 단지, 서자라는 이유만으로 왕위를 주지 않을려고 했던 그 옹졸한 행동들이 결국, 광해군을 망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선의 왕중에 선조와 인조를 제일 못난 왕이라고 생각하는데 , 선조가 그중에서 제일 못난왕이라 믿게된 계기가 이러한 행동입니다.
세자로서의 광해군의 역할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로써 광해군은 전쟁을 주도하게 되었고, 민심을 다독이며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백성들은 선조에게 등을 돌렸지만, 세자는 칭송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조정 대신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선조가 광해군을 지속적으로 비난하고 혹평한 탓에 광해군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선조와 광해군 사이의 갈등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이는 조선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결국, 자기 살려고 전장에 밀어넣은 광해군이 전장에서 죽지않고 살아 그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기에 불안했고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버린 자신이 백성들에게 버려질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임진왜란의 공적자 광해군에게 화살로 평생을 그 가슴을 후벼버리는 결과를 낳았을겁니다. 결국 선조가 옹졸하고 자신감이 없고 그의 이러한 행동때문에 광해군에게 큰 부담감을 안겨주고 떠났던 겁니다.
임진왜란에서의 활약 : 광해군 업적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상 중대한 사건 중 하나로, 일본군의 침략으로 조선이 큰 위기에 처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몽진(蒙塵)을 가기 위해 그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은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이정표로 남아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지목하고 일본군과의 싸움을 주도하도록 결정했습니다. 또한 조정을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광해군에게 분조(分朝)를 맡겼습니다. 이는 사실상 세자인 광해군에게 모든 전쟁 책임을 돌리려는 전략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분조를 맡은 광해군은 조정의 무능함과 당파 싸움으로 인해 일본군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자로서 민심을 다독이고 전장에서 싸워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이로써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의지를 다시 불러일으켰습니다. 백성들은 선조에게 실망하고 분노하면서도, 광해군을 칭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도 선조의 무능함에 실망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삼을 것을 우려했습니다. 더 나아가, 명나라와 일본군 사이의 강화 협상으로 인해 선조가 이 협상을 반대하면 명나라는 선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왕위에 앉힐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선조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며, 양위 소동이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임진왜란이 종료되고, 선조의 비(妃)인 의인왕후 박씨가 돌아가고, 인목왕후 김씨가 새로운 왕비로 입궁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 사이에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고, 왕위 계승을 놓고 논쟁이 시작됩니다.
세자인 광해군은 후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중전에게서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납니다. 이로 인해 적장자에 의한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명분론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영창대군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이미 민심을 얻어왔고, 선조와 영창대군의 나이 차이는 크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선조의 결정에 따라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정치적 소동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선조는 언제나 조선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헌신했으며, 광해군도 선조의 믿음과 민심을 얻으며 조선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선조와 광해군의 용기와 희생은 조선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 사건은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큰 교훈을 제공합니다.
광해군의 가계도
광해군의 가계도
북인의 역할
선조의 말년과 광해군 초기에는 북인(북쪽 인사들) 내에서 정치적인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진 북인은 각각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지지하였고, 이로 인해 북인 내에서도 갈등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선조의 죽기 직전에 왕위 계승을 놓고 갈등의 골로로 이어졌으며,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소북파는 지속적인 반란을 꾀하였으며, 결국 성공하여 말도안되는 빌미를 내세워 그를 끌어내리고 인조를 왕으로 내세워 명에 대한 의리를 다시 내세우게 되며 결국 병자호란을 일으키는 역사에 큰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광해군 중립외교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그의 통치 시기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하고 국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외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첫째로, 광해군은 명과 후금의 중립외교를 내세웠으며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둘째로, 광해군은 일본과의 관계를 조절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일본과의 갈등이 있었고, 광해군은 이를 관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일본과의 외교적인 교류를 통해 갈등을 최소화하고 미래에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광해군은 다양한 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다양한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와 경제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요약하면, 광해군은 외교 정책을 통해 조선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하고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일본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며 다양한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조선의 번영을 도모했습니다.
외교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 한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애매하게 서는 겁니다. 그러므로 해서 양쪽에서 최대한 국익을 내세우는게 외교입니다. 지금도 중국이냐? 미국이냐? 하다가는 또다시 망합니다. 미국을 좋아하고 중국을 좋아하는 관리나 국민은 있을지라도 나라의 외교는 그러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광해군의 사건을 통해서 명명백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광해군과 인조반정: 조선의 역사적 전환점
광해군의 정치적 판단과 조치
광해군은 즉위 직후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임해군과 영창대군, 두 형제에 대한 불안이 광해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임해군은 귀양을 보내 고립시키고, 이어 영창대군 역시 강화로 유폐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의 대북파 중신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칠서지옥과 서인의 반발
광해군은 칠서지옥이라 불리는 사태를 일으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신하들을 내쫓는 등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는 서인 일파에게 반동 투쟁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광해군의 행동은 칠서지옥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라는 말 그대로, 기이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로 인해 서인 일파는 반동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조반정의 배경과 진행
서인의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은 광해군의 행태에 반발, 무력정변을 계획한다. 1623년, 이들은 600-7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북 정권을 무너뜨리고, 능양군(인조)을 즉위시킨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반정 후의 정세
광해군은 체포되어 강화로 귀양을 보내고, 대북파의 주요 인물들은 처형되거나 귀양을 보냈다. 반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일파는 정사공신의 훈호를 받고 벼슬을 얻었다.
후일의 영향
하지만 이번 반정 이후에도 서인간의 불만과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1년 뒤 이괄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남인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면서 정치적으로 다소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처럼 광해군과 인조반정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낸다. 광해군의 권력 공고화 노력은 결국 서인 일파의 반발을 촉발, 그 결과로 인조반정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당시 정치적 무대를 크게 흔들어놓았고, 그 영향은 그 후의 조선 역사에까지 이어졌다.
결론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고 변화한 과정은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로 설명됩니다. 선조와의 비교, 북인 내에서의 갈등, 그리고 광해군의 세자로서의 역할이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역할을 고려할 때, 광해군의 왕위 계승과 그에 따른 변화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역사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내다봐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미래의 거울로 삼고 면밀히 검토하고 배우고 성찰해야 할것입니다.
본포스트는 개인적인 역사의 관점과 편견이 녹아있으니 글을 읽으실때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댓글